1990년 MBC 드라마 『똠방각하』는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었다. 최기인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완장 하나에 취해 스스로를 정의와 질서의 화신으로 착각하는 인간형을 통해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리, 이른바 ‘완장병’을 해부한 풍자극이었다. 드라마의 주인공 김덕수는 시골 마을에서 직책 하나를 손에 쥐자마자 안하무인으로 돌변한다. 기술도 없고 식견도 없지만, 그는 모든 문제를 호통과 질책으로 해결하려 든다. 설명은 변명으로 치부되고, 반대는 불손으로 낙인찍힌다. 결국 김덕수는 완장을 믿고 날뛰다 주민들의 몰매를 맞고 쫓겨난다. 해학으로 포장된 결말이지만, 메시지는 섬뜩하다. 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권력을 다루는 능력의 부재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경고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 이학재 사장을 공개 석상에서 질타한 장면은, 이 오래된 드라마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대통령은 ‘지폐를 책에 끼워 밀반출하면 적발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는 식의 가설을 전제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공항 보안검색의 기술적 한계, 외화 단속의 주체가 세관이라는 제도적 구분, X-ray로 지폐의 성격이나 액면을 식별할 수 없다는 기본적 사실은 질문의 전제에서 빠져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현장의 책임자가 이 구조를 설명하려 하자, 대통령은 “나보다 모른다”, “업무 파악이 안 됐다”며 답변의 내용이 아니라 태도를 문제 삼아 윽박질렀다.
이 장면은 정보 확인이나 정책 점검의 과정이라기보다, '엉뚱한 질문 → 원하는 답변의 부재 → 공개 질책'이라는 익숙한 서사를 따른다. 바로 『똠방각하』의 전형이다. 그 소설과 드라마에서 똠방은 늘 상식의 언어로 질문한다. 질문은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듣는 이에게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전제는 틀려 있다. 현장은 복잡한데, 권력자는 복잡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명이 길어지는 순간, 설명자는 무능으로 낙인찍힌다. 이때부터 조직은 침묵을 배운다. 진실은 사라지고, 보고서는 각하의 기분에 맞게 다듬어진다.
『똠방각하』가 보여준 비극은 독재나 폭력 그 자체가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무능한 자가 스스로를 유능하다고 확신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완장은 권한이 아니라 면죄부가 되고, 질책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공연이 된다. 그 결과, 정책은 개선되지 않지만 장면은 남는다. “기강을 잡았다”, “직접 챙긴다”는 인상만이 소비되고, 현장의 전문성은 위축된다.
국가 운영은 드라마가 아니다. 공항 보안과 외화 단속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과 제도의 문제다. X-ray로 돈을 ‘적발’할 수 있다는 믿음은 현실을 오해한 결과이며, 그 오해를 바로잡는 설명을 억누르는 순간 국정은 허구 위에 서게 된다. 『똠방각하』에서 주인공이 끝내 주민들의 몰매를 맞았던 이유는,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완장을 찬 무능은 개인의 추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조직을 침묵시키고,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 『똠방각하』는 과거의 드라마가 아니라 현재의 경고문이다. 권력자의 질문이 검증되지 않을 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설명이 ‘말이 길다’는 이유로 배척될 때, 비극은 이미 시작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이번에는 웃고 넘길 코미디가 아니라, 국가의 비용으로 치러질 현실이라는 점에서 더 무겁다.
더사피엔스 조전혁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