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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꽥꽥이’들의 사회

우리 사회의 넘쳐나는 더욱-더-좋은 꽥꽥이들(doubleplusgood duckspeakers)
- 오리들이 꽥꽥거리는 것은 생각의 결과가 아니다 -

최근 조진웅 사태를 둘러싼 반응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이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사고를 포기하는지 확인했다. 쟁점의 성격이나 사실의 무게를 따져보는 수고는 생략되고, 진영의 색깔만 확인되면 말은 자동으로 발사된다. “우리 편이면 보호, 상대편이면 응징.” 그 단순한 알고리즘이 윤리라는 이름을 달고 작동한다.

 

이 장면은 ‘1984’가 경고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감시사회” 이야기로만 기억하지만, 핵심은 언어다. 오웰이 창조한 신어(Newspeak)는 단어를 줄이고 뜻을 단순화해 사고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언어 체계다. 생각할 말이 사라지면, 생각도 사라진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꽥꽥이(duckspeaker)다. 오리처럼 훈련된 소리를 즉각 내는 인간형. 소설 속 전체주의 체제인 오세아니아의 통치자인 빅 브라더가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인간형은 더욱-더-좋은 꽥꽥이(doubleplusgood duckspeaker)다, 신어가 만들어지기 전의 일상어인 구어(舊語: Oldspeak)로 번역하면 double=더욱, plus=더, good=좋은, 오리=duck, 말한다=speak, 사람=er이다. 즉 “더욱 더 훌륭하게 오리처럼 즉시 꽥꽥거리며 말하는 사람‘ 정도로 번역된다. 판단은 필요 없고, 반응만 정확하면 된다. 진영이 원하는 음절을 정확한 타이밍에 꽥—하고 내뱉는 능력. 그게 미덕이다.

 

조진웅 사태에서 목격된 자동옹호의 합창은 이 정의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쟁점이 무엇인지, 왜 논란이 되는지, 어떤 기준이 적용돼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청소년기였다”, “교화되었다”, “의도는 선했다” 같은 구절이 버튼처럼 눌린다. 만약에 그 인물이 상대 진영이었다면 그 일이 벌어졌던 맥락도 필요없고 성장 서사도 필요없었을 것이다. 같은 잣대는 사치다. 중요한 건 우리 편이냐 아니냐다.

 

더 우스운 점은, 이런 자동발사형 인간들이 스스로를 깨어 있는 시민 즉 깨시민이라 믿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오웰이 조롱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doubleplusgood duckspeaker—의 전형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아니, 알 필요가 없다. 알게 되는 순간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다. 확신은 굳건하고, 생각은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윤리가 원칙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방패는 우리 편을 가리고, 창은 상대편을 찌른다. 피해는 지워지고, 서사는 관리된다. 질문은 귀찮고, 의문은 배신이다. 언어는 가벼워지고, 판단은 자동화된다. 꽥꽥거림이 토론을 대체한다.

 

오웰은 미래를 예언하려 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경계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그 경고를 웃어넘기는 사이, 신어(Newspeak)는 번역 없이 우리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단어는 살아 있고, 사고는 죽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말한다.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정작 극단은 사고를 멈춘 태도 그 자체인데도 원인은 도외시하고 현상만 가지고 지적질이다.

개탄스러운 것은 특정 인물이 아니다. 더 개탄스러운 것은 사고를 귀찮아하는 문화다. 질문하지 않는 도덕, 비교하지 않는 정의, 생각하지 않는 비판. 그 끝에는 언제나 꽥꽥거리는 합창이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버튼을 누르고, 누군가는 그 버튼에 조건반사적으로 꽥꽥이 소리를 낸다. 그리고 사회는 그 소리를 여론이라 부른다.

 

더사피엔스 조전혁 기자 |